커튼을 드리운 교실은 어스름했고, 누군가 창문을 열어둔 것 같았다. 교수가 옷장을 여는 동안, 라이언 가드너는 발치에 드는 햇볕이 물결치는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따뜻한 볕 아래로, 방금까지 그늘에 가려져 있는 줄도 몰랐던 먼지는 부유한다. 고성(古城)의 바닥은 돌로 이루어졌다. 걸으면 발소리는 남으나 발자국은 남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를 들고, 메마른 얼굴을 했다. 머릿속으로만 천칭을 들고 가늠한다. 자신은 ‘소리는 남는 발소리’일까, ‘남지도 않는 발자국’일까? ‘보이지 않는 먼지’인가, ‘눈에 보이는 성가신 망점’인가?
고개를 들면 햇살로 짠 베일 너머로 시커먼 어둠을 삼킨 옷장의 문이 보였다. 교수는 그에게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언제든 도움을 요청하라고 말했다. “괜찮을 것 같은데요.” 라이언은 표정을 부드럽게 풀어냈다. 눈을 가늘게 하고 웃었다. 무언가를 덮고 가장하기 위한 행위는 아니었다. 제아무리 이름 없는 가문일지언정 그는 나고 자라기를 마법사 사회에서 나고 자랐다. 보가트라면 카디프의 외가에 갔던 어느 날, 외할머니가 다락방에 나타난 것을 처리하는 모습을 본 일이 있었다. 그래봐야 별것도 아닌 게 튀어나올 게 빤했다. 그는 만사가 아무래도 좋았다. 14살의 나이로 세상만사에 무뎌졌다. 그래봐야 커다란 벌레나 나오지 않겠나, 14년 살며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심은 어른도 학우도 없었는데. 그밖의 무언가가 나타날 리가 없었다. 그의 삶은 시련 없는 서사시요, 잔잔한 호수다. 평탄하기 그지없는 삶. 강 같은 평화, 그래, 강 같은 평화 말이다….
눈을 깜빡였다. 그것이 다였다. 어느덧 옷장 앞에는 부산스러운 책상이 하나 놓였다. 상처가 많은 원목 가구다. 날 선 것에 베인 흠집이 많다. 라이언은 세공을 위한 부재료며 필요한 공구가 굴러다니는 그 책상을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알았다. 자신의 동생인 그웬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그가 일곱 살이고 그웬이 다섯 살이던 무렵에 그 애가 붙였던 빛바랜 풍선껌 판박이가 책상다리에 붙어 있었던 까닭이다. 저것은 가드너 공방에 있는 아버지의 책상이다. 두 눈에 거의 새겨지다시피 한. 그리고, 그 앞엔 체구가 큰 사람이 앉아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라이언은 보가트의 형상을 목격한 직후엔 도무지 그게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느꼈다. 날개뼈까지 닿도록 기른 오렌지빛 붉은 머리칼을 무성의하게 묶어둔 사람. 청록빛 눈동자. 그자는 라이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해야 하는 일을 할 뿐이다. 그늘 속에서 누군가의 영광이 되거나 명예가 될 반짝이는 세공품을 깎고 만드는 것이다. 체구와 생김으로 미루어 그는 라이언과 달리 다 자란 성인이었고, 아버지가 젊으셨으면 저런 모습을 했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고개를 움직일 적에 스친 눈빛을 알아차린다. 그 일을 하는데, 저자는 지긋지긋하다는 눈빛을 견지한다. 가드너 공방의 세공사가 할 만한 눈이 아니었다. 저자는 세공이 예술이라고 믿지 않는 자다. 사실은 저 흠집 많은 책상을 엎어버리고 성냥갑 같고 새장 같기만 한 공방을 불태워버리고 싶어 하는 자다.
저 이단은 누구냐? 라이언 가드너는 정답을 알고 있다. 지팡이를 쥔 손에 식은땀이 배어나도록 알았다.
그자의 이름은 라이언 크레드네 가드너다. 어쩌면 가드너 공방을 물려받을지도 모르는 미래. 아버지, 혹은 앞서 공방을 지켰던 수많은 세공사와 너무나도 똑같은 삶을 산 나머지 한눈엔 그게 대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조차 없어진 그의 내일. 시대의 포화조차도 어지럽힐 수 없는 끔찍하게도 강 같은 평화. 매 순간 그를 지독하게 추격하는 유일한 두려움이자 질식할 것 같은 우울.
어느덧 웃음기 하나 남지 않은 얼굴로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스스로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하는지 명시할 계획이 없었다. 왜 아니겠는가? 대체 어딜 가서 누구에게 무슨 수로 이해하게 만들겠나. 죄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한 평화와 평범한 삶을 증오한다고. 사실 자신은 깊은 물이 아니라 타오르는 불길이며, 실존하지 않고 도래하지도 않을 영웅주의적 망상에 취해 산다고. 서사시 속 아킬레우스가 약속받았던 그 덧없는 불멸을 향한 들끓는 열병에 걸려 있다고 말이다.
인류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종으로 진화했다. 그것이 라이언 가드너가 가진 유일한 신앙이다.
“리디큘러스.” 지팡이를 겨누고 휘둘렀다. 그리고 조금 웃었다. 보가트의 형상이 사라지고서도 오래도록. 지긋지긋한 일상의 덫에 잡혀 있던 자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을 닮은 솜인형만이 돌바닥에 널브러졌다. 초라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그 모습이, 결국 스스로의 본질 같았다.
“…어른이 되는 건 참 무서운 일이죠.” 이번엔 가장(假裝)한다. 고개를 들고, 평소와 같은 뜻 모를 미소나 얼굴 가득 그리고. “어째 좀 부끄럽네요! 역시 전 아직 어린아이로 지내고 싶은 모양입니다. 이미 어린이까진 아니긴 하지만, 하하….” 삶이 온통 거짓말이로군. 그 또한 생각했다. 그러나 어설픈 이해를 원하지 않았다. 그뿐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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