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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새뮤얼] 불공정한 성탄절 “체크메이트.” 백색 나이트가 산산조각이 났다. 마리포사의 퀸은 고개를 도도하게 쳐들고선 체스판을 행진했다. 엘리엇은 궁지에 몰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자신의 체스 말을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마리포사 키쿠노와 체스를 두면 늘 비슷하게 말려들었다. 겉보기엔 체구가 가녀린 그녀는 후플푸프 퀴디치 팀의 돌격형 전차(戰車)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몰고 다녔지만, 별명만큼 무작정 돌진하는 스타일의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퀴디치에서도, 체스에서도, 곱스톤에서도 영리한 마리포사를 한 수라도 이겨보려면 엘리엇 라이더는 체스판 앞에서 오래 골몰하고 판의 형세를 세밀하게 읽어야만 했다. “…졌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리 궁리해도 타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승복할 줄 알아야 하는 법. 그가 패배를 인정하면, 망가..
[엘리엇/리뉴얼] Le Cimetière Marin 1. 텔레비전에서 말했다. “2000년이 되면 세상이 멸망한다….” 초등학교 다닐 적의 일이다. 빨간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고장 난 라디오처럼 말했다. 21세기가 오면 종말할거래. 책상 하나를 둘러싸고 조그마한 몸을 굽혀 앉아 학종이 따위로 내기를 하면서, 화음이라도 쌓는 것처럼 종알거렸다. 21세기가 오면 종말한다니까. 급식을 먹고 난 후 교실의 희뿌연 먼지를 밝히는 햇살이 맑았다. 진짜야. 우리는 스무 살 조금 넘으면 죽게 된다고 텔레비전에서 그랬어. 엘리엇,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아나운서처럼 말하진 않았다. 턱을 괴고 나풀거리는 학종이 따위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선, “아무래도 좋아. 관심 없어.” 그러고 나면, 아이들은 시시한 대답을 들었다며 시무룩하거나 잔뜩 골이..
[엘리엇/7학년 STORY] 행운론 빛이 쏟아지는 샹들리에를 어깨 너머에 두고 연회장을 나서면 열기가 한 김 식었다. 엘리엇은 돌로 만든 복도에 도사리는 서늘한 공기를 폐부에 꾹 눌러 담았다가 미적지근한 날숨을 내려놓았다. 사람 속에 어우러져 간식을 나눠 먹고 환담하면 한껏 즐겁다가도 복도에 어린 그림자가 하나로 줄어드는 순간 덜컥 현실이 덜미를 잡는다. 자, 이제 졸업이다. 저 눈부신 파티가 끝나고 날이 바뀌고 해가 몇 번 더 저물기만 하면, 엘리엇은 유원지 같은 마법 학교로는 돌아올 일이 없을 거였다. 그는 후플푸프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었다. 망토 주머니에 손을 넣고, 허공을 밟듯이. 흘러가는 풍경은 느릿하게 기어가고, 엘리엇 라이더는 생각했다. 그래, 생각이란 걸 한다. 엘리엇 액셀 라이더는 그 누구보다도 ..
[엘리엇/리뉴얼]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는가 스펜서 선배가 추락했다. 후플푸프와 치른 경기는 아니었다. 학교는 한동안 어수선했다. 학교의 퀴디치 경기장에서 벌어진 파울 사건에 연루된 학생은 총 두 사람이었다. 추락한 수색꾼과 휘두른 몰이꾼. 양측 학부모들이 호그와트에 불려 왔다고 했다. 교무실에서 피해 학생의 부모가 언성을 높였다던가, 가해 학생의 부모는 제 아이를 옹호하기 급급했다고. “암흑기 탓을 했대. 자기 아이 기분도 요동치니까 충동적으로 그랬다는 거야.” 버틀러는 말했다. 엘리엇 라이더는 먼저 교복으로 갈아입은 채, 경기장 탈의실에 드러누워 올해로 퀴디치 팀에서 은퇴한다는 남은 팀원들이 환복을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경기에서도 파울이 난무하던데요.” 엘리엇은 새하얗고 높은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러다 사고 한 번 더 날까..
[엘리엇/4학년 과제(일반 마법)] 판도라여, 울지 마라. “라이더 군, 얼른 숙제를 끝마치도록 해. 그래야 나랑 스니치 찾기 놀이를 하지.” 그는 엘리엇보다 먼저 호그와트 도서관에 앉아 온갖 책과 양피지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슬리데린 교복을 입은 수색꾼 선배, 올해는 머리칼을 하나로 묶지 않고 반으로 잡아 묶었다. 새빨간 리본이 눈에 거슬렸다. 스펜서는 엘리엇에게 ‘우리 어머니가 골라주신 리본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느냐’고 했지만, 엘리엇은 그 말을 반쯤은 믿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관중석에서도 자신을 식별할 수 있게 만들려는 속셈이겠지. 그는 어딘지 관심받고 싶어 하는 면이 있었다. 수색꾼이라면 예외 없을 일이나. 그와 나란히 앉은 엘리엇은 스펜서를 무심한 눈길로 힐끔 바라보고는, “제가 아니라 선배가 문제거든요.” 그렇게 말했다. “저는 일반 마법 과제만 ..
[엘리엇/4학년 과제(보가트)] And if you want some fun ※ 인용 가사 출처: Ob-La-Di, Ob-La-Da · The Beatles https://youtu.be/_J9NpHKrKMw 텅 빈 교실에 마련된 옷장은 덜컹거렸다. 전축이 돌아갔다. 저것은 기계처럼 보이지만, 다이애건 앨리에서 온 물건임이 분명했다. 엘리엇의 마이마이와 라디오, 삐삐, 만보기는 마차가 호그와트에 진입하면 여지없이 망가졌다. 음악을 걸어놓은 것은 누구일까. 교수님, 혹은 장난꾸러기 소리의 요정, 아니라면 먼저 실습을 마친 누군가일 수도 있겠다. 알고 있는 음악이었다. 적당한 템포의 음악, 한 세대가 지난 유행가(Happy ever after in the market place…)…. 엘리엇은 옷장과 똑바로 마주 서서 지팡이를 쥔 채 실습과 무관한 상념에 휩쓸려 다녔다. 그는 그렇게..
[엘리엇/리뉴얼] 숨이 막히도록 우울한 세상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스니치가 잡혔습니다! 경기를 종료합니다!” 그날은 하늘이 높았다. 경기의 소음을 비집고 틈틈이 상황을 중계하던 이는 그리핀도르 학생으로, 엘리엇보다 두 살이 많다고 했다. 학교에서 손꼽히는 스포츠 캐스터라나 뭐라나. 10대의 나이로 정말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니 별명에 가까울 터다. 발음은 정확하지만, 억양에서 그녀의 고향이 아일랜드라는 것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연습 경기였다. 관중석엔 사람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대부분 3학년보다 어린 저학년이었다. 오늘 처음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의 친구들. 커다란 도화지에 퀴디치 경기장에서 처음 날게 된 친구의 이름을 적고 수줍은 응원을 하던 사람들. 그 속에는 물론, 엘리엇 라이더와 안면이 있는 이들도 있다. 사랑하는 그..
[엘리엇/1학년 과제(마법의 역사)] I want to be happy 호그와트가 온통 소란이다. 동물들이 사라졌다던가, 엘리엇 라이더가 돕기는 어려운 일이다. 동물을 발견해도 만지기 어렵고, 누군가를 불러오기 위해 자리를 떠나면 발견한 동물 친구가 가만히 있어 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나. 그는 친구들을 믿기로 했다. 더 늦어지기 전에 미뤄두었던 숙제를 하자. 후플푸프 휴게실에 앉아 양피지를 펼쳐두고, 아직 새것 같은 깃펜에 잉크를 묻혀 큼직하게 제목을 다는 것이다. 버킷리스트…. 주제가 큼직할수록 머리는 하얗게 비었다. 하고 싶은 일. 그래, 살면서 하고 싶은 일 말이지…. 그는 먼저 주어를 적었다. ‘나는(I)’, 침묵하듯이 손길이 멈추었다. 머리에 냉큼 떠오른 문장은 ‘건강하게 살고 싶다’, ‘오래 살아야 한다’ 따위였다. 그렇지만 작은 머리를 굴려 검토해보건대, 그건..
[엘리엇/1학년 과제(비행)] Hysteria 엘리엇 액셀 라이더는 부모님이 보고 있지 않을 적이면 그네에서 자주 뛰어내렸다. 호그와트에 오기 전, 에든버러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의 일이다. 어린이들끼리 모여 노는 놀이터에는 필연적으로 학부모들이 모여 앉기 좋은 벤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엘리엇의 어머니인 실비아 라이더는 모난 사람은 아니었다. 시대가 모났지. 그녀는 아이가 소외되지 않도록 학부모 모임을 소홀하진 않았고, 가끔 놀이터에서 노는 엘리엇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럴 적이면 엘리엇은 꼭 그네가 고점에 달했을 때 몸을 던져서 뛰어내렸다. 착지해도 모래는 많이 패이지 않았다. 그에겐 하나도 어렵지 않았던 일이다. 몸을 날려서 가볍게 착지하는 것. 그러면, 그네를 타기 위해 줄을 섰던 아이들 사이에 파도와 같은 손뼉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청나다!”..
[콘젬] 관성의 법칙 달리아 윈프리드는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미래 시제를 사용할 수도 있겠다. 뻔했다. 그 여자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학교의 부름이란 부름은 모두 거절했다. 내가 무슨 사고에 휘말려 선생이 전화를 걸어도 그녀의 답은 똑같았다. 무응답 혹은 묵묵부답. 나의 선생이란 작자와 어머니라는 인간 사이에 흐르는 갑갑한 침묵. 나는 단칸방에서 통화 아닌 정적 속의 치열한 대치 상황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불현듯 그 모든 상황이 지긋지긋해져서 집에서 뛰쳐나오기 일쑤였고, 대부분은 길바닥에 앉아 멍청한 시간을 허비했다. 운이 좋으면 헤이스팅스 부부가 내게 저녁 식탁 자리 한 구석이나마 내주었다. 그들도 먹을 게 궁핍한 날엔 나를 앉혀줄 수가 없었지만, 초라한 식탁이나마 좋았다. 아일라 할머니가 좋아하시는..